오늘 야근을 했다. 모두가 돌아가고 텅 빈 사무실에서 타자를 치는 동안 내가 내는 부스럭 소리에 놀라 흠칫 주변을 살핀다.
아직도 밤 공기는 차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핸드폰 액정 속 시계를 본다. 이미 9시 반, 공원의 기타연주자들이 돌아 갈 시간이다. 혹시 라는 기대, 두 정거장 전에 있는 공원에 내린 후, 공원 층계로 만든 작은 무대로 걸어간다. 연주가 끝났는지 기타리스트도 관객도 자리에 없다.
아무도 없는 공원 계단에 주저앉는다. 아직 찬바람이 내 뺨을 할퀴고 머리카락 속을 흩트려 놓는다. 인적이 한적한 공원에서 홀로 눈물을 떨어뜨린다.
***
셋이 함께 다니던 술집, 음식점, 커피숍, 언제부턴가 나 외에 둘만이 공유하기 시작했다.
작년 첫눈이 길가에 녹았을 즈음, 둘이 사귄다는 소식을 지인에게 들었을 때, 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랐다. 남모르게 울고 또 울었다. 은영이 그날 저녁 나에게 할 얘기가 있다며 저녁 약속이 있는지 물어본다. 듣고 싶지 않는 약속,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12월 마지막 주에야 회사 앞 레스토랑에서 서로 마주했다. 격양된 목소리로 말 할 수 없는 고백을 삼켰다.
은영: 나 말이야, 너에게 고백할거 있어.
나: 뭐? 대리님하고 사귀는 거? 잘 됐네, 대리님 나이도 있고 이젠 결혼 해야지, 매일 나 붙잡고 하소연 하는데, 나도 이제 너무 지쳤어.
은영: 미안해. 그냥 이렇게 됐어.
나: 미안 할게 뭐야~ 축하해
은영: 오빠랑 셋이서 같이 밥 먹을까 하다가 내가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앗, 대리님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나: 괜찮아.
은영: 너 표정이 안 좋아.
나: 피곤해서 그래.
그날 먹던 고르곤졸라 피자와 스파게티는 맛이 없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슬픔이 혀를 마비시킨다. 맛을 느낄 수 없었다.
***
가로등 불빛만 채우던 공원 안, 어디선가 음악이 들린다.
[정말 정말 괜찮나요.
별일 아닌 듯 잘 웃고 사나요.
나만 이러는 게 싫어
억지웃음 지어 가려도 새는 슬픔은 어쩌지 못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한 사람
미워 해봐도 싫지 못할 사람
가늠 할 수도 없을 만큼 간절히 원해도
안 되는 게 있어 그대 안에 나 살아가는 일
내 눈물이 난처할 그대라
난 맘 놓고 울지도 못하죠.
사랑하는 마음만으론 가질 수 없는
내겐 너무나 먼 곳일 그대라
아파죽어도 그댄 모를 사람
매일 빈 가슴 쓰려 낼 한 사람
백 번 천 번을 도려내고 또 버려보아도
안 되는 게 있어 절대 안 되는 일
그대 없는 듯 살아가는 일
왜날 지영선]
***
오늘 그와 같이 프로젝트 마무리 보고 때문에 회의실에서 작업했다. 밀폐된 공간, 그가 모니터를 보며 열중하는 모습을 훔쳐본다. 가끔씩 내 등뒤에 서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야릇한 온기가 그의 여자친구의 존재를 지워간다. 시간이 흐르고 시계가 7시가 넘어가자 그가 안절부절못한다.
대리: 미안한데, 오늘 여자친구와 100일이라서 밥 먹기로 했어. 이 일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해서, 너랑 나만 하는 일이라 다른 분께 맡기기도 어렵고, 너가 마무리 해줄 수 있어?
나의 마음을 이용하는 그에게 분노할 법도 한데 미련하게도 나는 그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한다.
나: 먼저 가세요. 마무리는 제가 할게요.
서둘러 나간 그는 지금까지 문자 한 통도 없다. 혹시 고맙다는 문자라도 보내 줄까 싶어서 일하는 내내 문자를 봤는데, 내가 그에게 부재중이다.
***
나지막하게 불러오는 노랫소리, 눈가의 물기를 황급히 지우고 노래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청량하게 들리는 음색이 나무에 가려지고 잎사귀에 숨겨진다.
-울지 마요.
음악이 끝나고 위로의 목소리가 흩어진다. 노래를 부르던 낯선 이는 자취를 감췄다.
난 여전히 할 수 없다. 그대 없는 듯 살아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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