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C에서 B코드 까지

[C에서 B코드 까지]10화 편지

◈나리나리◈ 2015. 6. 3. 20:02

봄이 왔다. 개나리가 노랗게 물들고 나뭇가지에 초록 잎이 돋아난다.

 

회사는 다른 프로젝트 시작을 알리며, 야근이 늘어났다. 정신 없이 업무에 치이고 밤샘작업으로 예민해진 직장 동료들과 자주 부딪친다. 기획팀 여자과장님과 한바탕 싸우고 업무 목표량을 채우느라 생각의 틈이 없어지자 더 이상 그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움이 잊혀지자 상현을 만나러 가는 날짜가 줄어간다.

 

토요일 늦잠 자고 일어나서 집안을 좀비처럼 헤맨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점심을 먹고 방한구석에 찌그러져 있는데 창문에서 비치는 햇살이 따갑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싱그러운 봄내음이 따뜻하게 데워져 피부에 와 닿는다.

겨울에 묵힌 짐의 먼지를 털어내고 방 청소를 시작한다. 겨울 옷들은 상자 속에 정리하고 얇은 봄 옷을 차곡차곡 장롱 속에 쌓는다. 상자가 비어져 갈쯤, 상자 밑바닥에 둔 기다란 상자가 보인다. 이 상자 낯익다.

 

상자 속에는 내가 멜 수 없는 넥타이가 있다.

 

그의 생일은 봄이 한창 무르익을 5월의 마지막이다. 작년에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직전, 나는 생일을 빌미로 숨겨놓았던 감정을 고백하기 위해 준비했다. 며칠 전부터 백화점을 돌면서 무슨 선물을 사야 할지, 그가 받으면 얼마나 좋아할지 생각하자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상자 속에는 내가 주지 못한 편지가 있다.

 

수많은 생각, 배려, 기대감, 상상 온갖 것이 그로 인해, 그와 함께할 미래를 꿈꾸면서도 막상 얼굴을 보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편지를 보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할까? 나의 고백을 받아 줄까? 그와 어색해지면 어떡하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두려움이 따라온다. 그가 나를 거절하고, 피하게 된다면 상처받을 나란 사람이 걱정되어 나를 망설이게 한다.

 

도달하지 못한 편지를 열어본다.

 

애절한 문구, 사랑한다는 단어, 달달한 언어들로 채워진 편지를 읽자 그가 생각났다. 이어진 실타래처럼 타인에게 내가 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던 그가 떠오르고 다시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그의 눈빛의 잔상이 남는다. 나와 저녁을 먹기로 약속 한 그는 급한 다른 약속이 생겼다며 그의 생일날 나와 함께 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고심 끝에 구입한 새 옷을 입고 괜찮다고 웃어 보이던 내 손에 든, 그에게 줄 선물을 끝내 건넬 수 없었다.

 

그에게 잔인하게 거절당한다고 해도 그때, 용기 냈다면 그와 나와의 관계도 달라졌을까?

 

공허함이 가득한 시간이 나를 애달픈 구덩이 속에 넣는다. 대충 잠바를 걸치고 상현에게 문자를 한다.

 

‘어디 계세요?’

 

클럽 무대에 조명이 빛을 모으고 40대쯤 보이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가 무대 위 의자에 앉자 박수가 쏟아진다. 남자는 통기타를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오늘밤도 잃어버린 옛사랑의 기억으로 적적했을 당신에게 한 곡 띄어 드리겠습니다. 김광진의 편지입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 두겠소

행여 이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

오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가오.

편지_김광진]

 

누군가 내 어깨를 친다. 내가 고개를 돌려보니 상현이 반갑게 인사한다. 나의 맞은편에 앉은 후, 목이 말랐는지 내가 마시던 맥주를 한번에 비운 뒤, 주전부리를 먹는다.

 

상현: 이 노래 좋죠?

  : , 좋네요.

상현: 김광진이 아내 분하고 결혼하고 싶었는데, 여자 집에서 집안 반대가 심했대요. 다른 남자와 결혼하라고 여자네 부모님이 주선하셨는데, 아내 분이 김광진을 너무 사랑한다고 해서 그 남자를 거절했대요. 그 남자가 여자를 놔주면서 써준 편지에요.

  : ~

상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놔줘야 하는 남자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죠?

  : , 애절하네요.

 

상현이 감상에 젖은 듯 무대를 바라본다. 상현과 나, 아는 것이라고 이름 밖에 모르는 사이, 음악 하나로 서로의 마음이 공유 된다.

 

대리님, 진정 행복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