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색 중형차는 갓길로 차선을 바꾼 뒤, 우회전하며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간다. 김대리의 차는 아파트 입구 앞에 멈추고,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내릴 준비를 한다.
김대리 : 내일 일요일인데 뭐해?
나 : 기타 연습가요.
김대리 : 기타? 기타연습 끝나고 뭐해?
나 : 약속 없어요.
김대리 : 기타연습 끝나고 보자. 연락할게
나 : 예.
차의 헤드라이터는 어둠을 헤치고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다. 그가 사라진 공허한 거리 위, 긴장한 다리는 힘이 풀린 탓에 계단 난간에 걸쳐 앉는다. 그와의 만남을 간절히 원했으나, 지금의 나는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무의미한 단어 나열만 뇌리에 남는다. 차 안에서 본 그의 얼굴이 아련하게 흩어진다.
그에게 향한 나의 짝사랑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 이기적이게도 상현이 보고 싶다. 나는 서둘러 상현에게 전화해 보지만 상현은 여전히 부재중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아파트 밖으로 걸어간다.
상현의 작업실 앞에 서서 어두운 작업실 안을 살핀다. 상현의 작업실 앞 계단에 쭈그려 앉아서 상현을 기다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추워진 가을 날씨 탓에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잠을 깨서 상현의 작업실을 보니 여전히 어둠 속이다. 계단 위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리고, 뒤돌아보니 상현이 서 있다.
나 : 아까 미안해. 그게 갑자기 일이 생겨가지고, 미안해.
기타 케이스를 손에 쥔 상현의 주먹은 부르르 떨린다. 짙은 술 냄새, 충열 된 눈, 입은 굳게 다문 채, 나를 스치며 계단을 내려가서 작업실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 마주친 싸늘하게 식은 상현의 얼굴에 나는 어찌할 바 모르고 당혹스러워진다. 나는 상현의 작업실 문을 두드린다. 대답 없는 문 너머의 그, 나는 그의 슬픔을 잘 알고 있기에,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위로의 말을 내뱉지 못한다. 오히려 어설픈 변명이 그에게 생체기만 낼 뿐, 서성이던 발걸음을 돌려 계단 위를 올라간다.
그의 작업실을 벗어나 골목길을 내려가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어깨 위로 옷을 덮어 준다. 뒤돌아보니 상현이다.
상현 : 감기 걸려.
나 : 미안해, 그게 말이야.
상현 : 변명하지 마, 그게 더 비참해. 너가 좋아하는 그 사람 맞지?
나 : 응.
상현은 내 말끝을 잘라내고 작업실로 돌아간다. 멀어져 가는 상현의 등을 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비겁하다. 그 동안 상현에게 애매하게 희망을 심어주면서, 나를 사랑하는 상현의 마음을 이용해 위로 받으려 했던 나는,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할 자격조차 없다. 죄책감이 내 심장을 옥죄인다.
상현이 빌딩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을 서 있다가, 내 어깨에 걸친 그의 커다란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발걸음을 돌린다.
다음날, 나는 천장을 본다. 장롱 속, 옷은 널브러져 있고 방바닥은 잡동사니로 엉망진창이다. 침대에 누워서 혼자 쳇바퀴 도는 시계만 보고 있다. 오후 3시, 지난 주였다면 작업실에서 상현과 단둘이 앉아서 기타를 배우고 있었다. 핸드폰에는 상현의 소식조차 없다. 내가 보낸 카톡을 글귀만 계속 반복해서 읊조린다.
-안녕~ 몸은 괜찮아?
침대 모서리에 상현이 준 옷이 찌그러진 채 걸려 있다. 일어나서 상현이 준 옷을 털어서 옷걸이에 건다. 벨소리가 울려서 황급히 핸드폰을 들자, 김대리 이름이 뜬다.
김대리 : 지금 어디야?
나 : 집이요.
김대리 : 알았어, 그리로 갈게.
나는 김대리를 만나기 위해 화장대 앞에 앉는다. 어제 울다 잠든 탓에 부은 얼굴이 화장대 거울에 비치자, 컨실러로 얼굴의 흉한 부분을 가린다.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레스토랑 안, 웨이터의 손에 건네 받은 메뉴 판을 보는 김대리는 세트 메뉴를 주문한다.
김대리 : 이번에 회사 옮길 때 연봉을 높게 쳐주더라고 월급이 많이 올랐어.
나 : 멋지시네요.
김대리 : 그 동안 대시하는 남자는 없었어?
나 : 예~ 뭐~
김대리는 검붉은 와인을 마신 후, 웨이터를 부른다. 웨이터는 능숙하게 김대리의 빈 와인 잔을 채운다.
김대리 : 은영이와 헤어지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너더라. 작년에 정말 힘들었을 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 너였는데 말이야. 그때 왜 나는 너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작년의 나는 그에게 여자가 아닌 대체품이었다. 전 여자 친구 빈자리, 은영의 상흔을 메우는 존재, 언제든 상처 받고 힘들면 다시 돌아가야 할 곳, 더 사랑한다는 죄목으로 상대방의 슬픔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내가 상현에게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위치가 다르다.
여전히 그의 마음 속 내 위치를 알면서도 나는 그의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김대리 :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아~
나 :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요.
김대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김대리 : 그 동안 모아둔 돈도 있고, 이번에 은영이와 결혼 준비하면서 마련한 집도 있어. 너만 괜찮다면 나랑 결혼할래?
그와 함께하는 안정적인 미래, 수도권 소재 집, 대기업 월급, 중형차, 가끔 그와 가는 해외여행, 기념일마다 그가 사올 명품백,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갈 그곳에 김대리가 있다.
몇 달 전까지 사랑을 운운하던 내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나의 미래를 타인에게 빗대어 견주고 있다. 계산기를 두들기던 나의 손짓에도 여전히 김대리라는 답을 주지 못한다.
김대리 : 생각해봐, 기다릴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보조석에 앉은 나는 창 밖을 바라본다. 상현과 걸어가던 길, 상현과 같이 나누어 먹던 음식집, 상현과 함께 기다리던 버스정류장, 같은 장소가 낯설게 느껴진다.
그의 차가 나를 집 앞에 세워주고 떠나자, 미련의 끄트머리에 생긴 틈으로 헛헛한 바람만 들어오고 나간다. 무기력해진 나는 상현에게 전화를 건다. 상현에게 오늘 기타 수업은 사정이 생겨서 못 갔다고 얘기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친구라는 호칭을 스스럼없이 읊조리고 싶다. 여전히 상현은 전화기 너머에 없다.
날씨가 싸늘하다. 사방은 어두워지고 가로등 등불만 밝히는 상현의 작업실로 가는 길목,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그가 보인다. 상현이 넘어지자 나는 그를 향해 달려가다가 멈춘다.
[얼마나 한참을 서있었는지
멀리 너의 모습 보면서
그 모습 사라질 때까지 나의 발걸음은
움직일 수 조차 없었지
내가 어떤 사랑 받았었는지
내가 어떤 아픔 줬는지
이제야 널 보낸 후에야 돌아선 후에야
다시 후회하고 있지만
떠나간 다른 사람 때문에
비틀거리던 나를 힘들게 지켜주던 널
바라보지 않았지
그렇게 사랑이 온지 몰랐어.
기대어 울기만 했잖아
그런 내 눈물이 너의 가슴으로 흘러
아파하는 널 나는 밀어냈었지
사랑은 떠난 후에야 아는지
곁에 두고서 헤맨 건지
이제야 알겠어 너에게 기대어 울던
그 순간들이 가장 행복했었던 나를
내가 어떤 사랑 받았었는지
내가 어떤 아픔 줬는지
이제야 널 보낸 후에야 돌아선 후에야
다시 후회 하고 있잖아.
떠나간 다른 사람 때문에
비틀거리던 나를 힘들게 지켜주던 널
바라보지 않았지
그렇게 사랑이 온지 몰랐어.
기대어 울기만 했잖아
그런 내 눈물이 너의 가슴으로 흘러
아파하는 널 나는 밀어냈었지
사랑은 떠난 후에야 아는지
곁에 두고서 헤맨 건지
이제야 알겠어. 너에게 기대어 울던
그 순간들이 가장 행복했었던 나를
보보_ 늦은 후회]
나는 상현에게 이기적이었다.
그는 온전히 나를 사랑했고 나는 항상 한 발짝 물러서서 나를 사랑한 그의 마음을 사랑했다. 내겐 상현은 내 전부를 주며 짝사랑한 김대리와 다르다.
대단하거나, 부족하거나,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공유했던 시간이 달랐기에 사랑의 크기가 상대에 따라 다른 것 뿐, 나는 여전히 상현이 없으면 허전하다.
지금의 나는 상현이 간절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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