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사무실 곳곳에 휴가를 떠난 이들로 빈자리가 듬성듬성 나 있다. 빈 공간을 메우는 건 찬바람을 내뿜는 에어컨뿐, 사람의 온기가 식어간다. 사내 메신저로 알림 창이 뜬다. 결혼 준비로 한참인 언니다.
언니: 갑자기 축가 불러주기로 한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너 기타 배운다고 했지? 혹시 내 결혼식에서 축가 불러 줄 수 있어?
배운지 한 달이 넘어가는 애매한 실력에 말을 돌린다.
나 : 아직 한 곡을 부를 만한 실력이 아니라서, 기타 선생님께 부탁해 볼까요?
언니: 응, 고마워
늦은 오후, 업무를 끝내고 클럽으로 향한다. 클럽의 좁은 계단 길, 오늘은 언니와 함께 밟는다. 통로 안으로 흘러나오는 달달한 음악이 문을 열자 소리를 터트린다.
나와 언니가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당연하다는 듯이 맥주와 주전부리를 테이블 앞에 놓는다.
웨이터 : 이쪽 분도 같은 걸로 드릴까요?
언니 : 전 오렌지 주스 주세요.
웨이터가 흘긋 언니 배를 훑더니 주방으로 돌아가고 상현이 내 옆에 서 있자 나는 내가 앉은 자리를 내어준다. 간단한 인사소개를 끝내고 언니가 상현을 살핀다.
언니 : 언제부터 기타 쳤어요?
상현 :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를 쳤으니, 십 년은 넘었죠. 축가로 생각해 두신 곡 있으세요?
언니 : 없어요. 기존에 불러주기로 했던 친구가 노을의 청혼을 불러주기로 했어요.
상현 : 청혼으로 하면 되나요?
언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상현의 안내에 따라 클럽 뒤편 직원 휴게실로 안내한다. 휴게실 안, 여준이 키보드의 음정을 손질 하다 말고 나를 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든다.
여준 : 아영, 오랜만이네, 상현이 있는데 항상 있구만.
상현 : 오늘 다른 이유 때문에 온 거야.
나 : 진주는?
여준 : 오늘따라 우리 동동이가 초콜릿 먹고 싶다고 해서 사러 갔어.
상현 : 너가 사오지. 진주 시키냐?
여준 : 진주 성격 알잖아. 내가 말한다고 들을 위인이냐?
나도 모르게 수긍되어 고개를 끄덕인다. 여준은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노래 연습을 한다.
[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 용기 내볼래요.
나 오늘부터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처음인걸요. 분명한 느낌 놓치고 싶지 않죠.
사랑이 오려나 봐요.
그대에겐 늘 좋은 것만 줄게요.]
상현은 언니에게 간이의자로 안내한 뒤, 기타를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언니는 여준의 음악을 감상하다가 상현과 눈이 마주치자 호들갑 떤다.
언니 : 저 곡으로 할게요. 저 곡이요~ 축가 저 곡 불러주세요.
상현 :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 말씀하시는 거 맞죠?
언니 : 예~ 예~ 예전에 남자친구가 한강운치에서 데이트 중에 꽃을 주면서 저 노래를 불러 줬어요. 노래 못 하는 오빠가 저한테 고백한다고 학원 다니면서 연습했더라고요. 저 곡 불러 주세요.
언니의 들뜬 목소리, 재빠르게 움직이는 제스처, 그때의 추억에 젖은 눈빛. 언니는 그리워하고 있다. 이 남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던 그 순간을.
상현이 기타 줄을 내리치자 옆에 있던 여준이 끼어든다. 둘이 즉석으로 만든 하모니가 시작 된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내 사람인 걸 알았죠.
내 앞에 다가와 고갤 숙이며 비친 얼굴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답죠.
웬일인지 낯설지가 않아요.
설레고 있죠. 내 맘을 모두 가져간 그대
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 용기 내볼래요.
나 오늘부터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처음인걸요. 분명한 느낌 놓치고 싶지 않죠.
사랑이 오려나 봐요.
그대에겐 늘 좋은 것만 줄게요.
웬일인지 낯설지가 않아요.
설레고 있죠. 내 맘을 모두 가져간 그대
참 많은 이별 참 많은 눈물
잘 견뎌냈기에
좀 늦었지만 그대를 만나게 됐나봐요.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요.
두근거리는 맘으로 그대에게 고백할게요.
나 오늘부터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처음인걸요.
분명한 느낌 놓치고 싶지 않죠.
사랑이 오려나봐요.
그대에겐 늘 좋은 것만 줄게요
내가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유리상자_사랑해도 될까요]
상현의 눈빛이 노래하는 내내 나에게 머무르고, 언니는 결혼예정인 그를 생각하며, 여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걱정한다. 모두 각각의 사랑을 나눈다.
진주 : 둘이 여기서 판을 벌렸구만, 벌렸어.
여준 : 자기야. 왜이리 늦게 들어와~ 잉
진주 : 내가 찾는 초콜릿이 보이지 않아서.
상현 : 무슨 초콜릿인데?
진주가 손에 든 것을 흔든다.
진주 : 조약돌 초콜릿, 모양도 삐뚤삐뚤, 크기도 제각각, 달콤하니 맛있어, 상현아 오늘 내 대타 좀 해줘. 어제 무리했더니 목이 나갔어. 둘이 방금 부른 거 무대 위에서 한 번 더 불러.
여준 : 남자 싫어해.
상현 : 난 뭐 좋은 줄 알아?
둘이 옥신각신 하다가 진주의 눈빛을 피해 서둘러 대기실 밖으로 나간다. 나와 언니, 진주는 테이블 자리로 돌아와서 그들의 무대를 감상한다. 노래가 중반을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뜬금없이 언니가 작은 돌을 내기 던진다.
언니 : 상현이라는 사람, 너 좋아하는 거 같아.
나는 수줍게 얼굴을 붉힌다.
언니 : 보니깐 직장도 없고 기타리스트로도 성공한 거 같아 보이지도 않아, 요즘 우리 같은 대기업 다니는 사람도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세상인데, 음악 하는 친구랑 만나?
나는 온몸이 발가벗은 듯 한 수치심이 몰려온다. 그를 모르는 언니에게 그의 사랑이 하찮게 치부되는 것이 나를 향한 비난인 듯 표정이 굳는다. 나의 상사이자 직장 내에 서열이 높은 그녀에게 터져 나오는 울분을 짓누르며 반박한다.
나 : 저렇게 보여도 곧 앨범 나올 거예요.
언니 : 내가 뭐라고 할 것 아니지만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너 명문대학교 나오고 대기업 들어갔으면, 고생 안 시키는 사람 만나서 편안하게 우와 떨며 살아야지. 사랑, 오래 갈 거 같지? 계절만 바뀌어도 달라져. 이젠 너도 결혼을 생각 할 나이잖아. 대충 만나지 말고 너랑 비슷한 사람 만나봐.
그의 고뇌, 그의 아픔을 아는 나는 입안을 옹알거릴 뿐, 언니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 내가 사는 세계, 그가 사는 세계가 다름을, 어렴풋이 느낀 까닭일까? 명품백, 주식, 해외여행, 이직을 안주로 논하던 회사 내 그들과 내일의 미래조차 암담한 회사 밖 그들 사이의 간극. 나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방금 웃고 떠들던 상현이 무대 위에서 이방인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진주 : 조약돌 초콜릿 참 맛있네, 이런 모양도 달달하고, 저런 모양도 달달하고, 어떤 모양이든 달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진주의 화법을 이해하고 웃자, 언니는 어리둥절하게 나와 진주를 번갈아 본다. 별일 아닌 듯 진주는 조약돌 초콜릿을 나와 언니에게 한 주먹씩 준다.
김대리를 사랑하면서 배웠다.
사랑의 조건, 자격, 어떤 말이 끼어들기 전에, 그의 눈을 통해 반사되는 내가 보이는 것.
상현의 노래는 초콜릿처럼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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