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방안을 반으로 양분한다. 장롱 속, 묵혀둔 옷들을 내 몸에 견주어 본다. 원피스를 입기에는 그가 우리의 만남에 의미를 부여 할 듯싶고 청바지를 입기엔 성의 없어 보인다. 몇 번의 망설임 후에야 맘에 드는 몇 벌을 추려 낸다. 단지 기타를 사러 가는 거뿐인데도 들뜬 마음은 가라앉지 않는다.
오후 2시 공원 앞, 공원 주위를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 상현이 보인다. 그의 실루엣과 가까워질수록, 나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이 기쁘기도 하면서도 어색하다. 늘 기다리는 쪽은 나였으니깐, 그의 관심, 그의 사랑을 갈구하던 나의 미련, 상현을 만나러 가는 이 순간마저 야속하게도 잊어버린 옛사랑이 떠오른다. 그에게 향하던 발걸음 위로 망설임의 무게가 느껴질 때 쯤, 그가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든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는 길의 모퉁이, 초록색 신호등의 깜박이는 숫자가 줄어들자 상현이 내 손을 잡고 횡단보도 위를 달린다. 횡단보도를 건넌 후에야 그가 다른 곳을 응시하며 내 손을 놓는다.
-위험할까 봐.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한, 그가 앞서서 걸어가자 나는 그의 뒤를 조용히 밟는다.
지하철을 타고 종각역 출구로 나오자, 수많은 인파가 거리를 메운다. 그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에게 낯설지 않은 이곳을 설명한다.
-이쪽으로 가면 청계천이 나오고 저쪽은 탑골공원, 아! 이 길로 가면 인사동 거리야~ 길 잃어버릴 수 있으니깐 나만 따라와~
그가 한 발짝 앞선 보폭으로 걸어가자 나는 그의 뒤를 따른다. 사람들이 터놓은 길목을 침범하는 다른 사람들의 행렬로 그와 나의 거리의 차가 멀어진다. 그는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나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자, 그는 인파를 헤치며 내게로 와서 내 손을 잡고 걸어간다. 오랜만이다. 누구에게 사랑 받는 다는 느낌, 거절당하는 게 당연하고 외면당하는 게 익숙했던 내게 그는 봄 햇살 같이 따뜻하다. 그의 체온이 나의 손으로 전달되어 온다.
낙원 상가 안, 다양한 악기가 전시한 그곳을 그는 놀이터에 놀려온 아이처럼 누빈다. 타악기 전문매장 앞에 설치 된 드럼을 친다거나 피아노 매장 앞에서 검지로 건반을 누르면서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학교종이 땡땡땡’ 노래를 부른다. 그가 피아노를 사러 온 손님인 줄 알고 허겁지겁 나오시는 주인아저씨를 피해 그와 나는 상가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기타전문매장 간판 속, 기타가 벽면에 장식된 매장 문을 연다.
기타매장 주인이 의자에 앉아서 기타 줄을 조율하다 말고 손님을 마중한다.
주인: 뭐 찾으시는 거 있어요?
상현: 여자 분이 연습용으로 칠 기타를 찾는데요. 어떤 게 있나요?
주인은 벽에 걸린 기타를 지적하면서 사양을 읊는다.
주인: 드래드 넛 형태가 잘 나가는 편이죠. 이 제품은 마감이 UV코팅되어 나오기 때문에 색상이 변하지 않고요. 저 제품은 후판을 고정하는 나무 하나를 덧대어 가격대비 울림이 선명한 편이죠.
주인의 친절한 설명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하나의 기타만을 응시하던 상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상현: 이 기타 한번 쳐봐도 되죠?
주인: 예~
상현은 벽면에 걸린 기타를 받자 의자에 앉아서 기타를 무릎에 올려놓는다. 기타 줄을 한두 번 내리치자, 그는 음색이 이상한지 고개를 기우뚱한다. 줄 끝에 나사를 조인 후, 몇 번을 튕기기를 반복하다가 기타 연주를 시작한다.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내 외롭던 지난 시간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이 되고
조그맣던 너의 하얀 손위에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의 약속이 되어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초록의 슬픈 노래로 내 작은 가슴 속에
이렇게 남아 반짝이던 너의 예쁜 눈망울의 수많은
별이 되어 영원토록 빛나고 싶어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너에게 난 나에게 너_자전거 탄 풍경]
주인과 나는 동시에 박수 친다.
주인: 연주 좀 하시나봐~
나 : 기타리스트에요.
주인: 어쩐지 기타를 좀 아시더라니, 그 기타 한정품이라 숨겨놓은 건데 용케 찾으셨네요. 전문가들이 예비용으로 하나씩 구입한다는 그 기타죠.
상현: 이걸로 주세요.
나와 주인의 계산이 끝나자 주인이 건네준 기타 케이스를 상현이 어깨에 멘다. 그의 안내하는 손짓에 따라 낙원상가 밖으로 나오는 내내, 노래의 여운이 내 입가를 흥얼거리게 만든다.
나 : 노래가 엄청 좋아~
상현 : 영화 클래식 OST야. 비가 많이 오는 날, 학교 캠퍼스 나무아래 갇힌 손예진을 위해 조인성이 겉옷을 벗어서 비를 맞지 않도록 씌워주며 둘이 도서관까지 뛰어가지. 그때 나오던 노래야. 너 클래식 영화 봤어?
나 : 아니~ 조인성이 나온다니 보고 싶다.
상현 : 나도 오랜만에 보고 싶네. 보러 갈까?
나 : 어디로 가면 되?
상현 : 저기
상현의 망설이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DVD방이다.
상현 : 좀, 그렇지, 요즘은 옛날 영화를 볼 데가 없네.
나는 팔꿈치로 상현의 팔을 치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호기롭게 말을 건다.
나 :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영화만 볼 텐데, 괜찮아, 가자
DVD방 안, 19금 영화가 가득 채운 벽면 앞에서 나는 클래식이라는 영화를 찾고 있다. 에로틱한 문구가 넘쳐나는 그곳을 보는 나를 상현이 등을 가볍게 친다.
상현: 왜 보고 싶어져?
나 : 아니, 아니~ 그냥 잠깐 봤어.
상현이 당황하는 나를 향해 큰소리로 웃는다.
영화는 잔잔하고 고요하다. 이름마저 기억나지 않던 남자아이가 생각나고, 어설프게 끝난 풋사랑도 떠오른다. 그리고 그가 생각난다. 아프다. 내 슬픔을 묻어둔 심장이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불쑥 튀어나와 나를 집어 삼킨다. 그의 흔적조차 없는 낯선 공간에서도 나는 절대 그와 이별할 수 없다.
매점에 우산을 놓고 손예진의 우산이 되어준 조인성의 마음을 알고 손예진이 비오는 캠퍼스를 뛰어가는 장면, 무대 위에서 조인성을 만난 손예진과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
행복한 장면에서 부끄럽게도 울음이 복받쳐 나온다. 서럽다. 그의 주위에서 전전긍긍하며 서성이던 나의 마음, 언젠가는 그가 나를 좋아해 줄 거라는 기대, 언젠가는……, 언젠가는……, 우리는 연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바람에 내가 잠식되어 버렸다.
상현이 내 눈가를 닦아준 뒤, 안는다. 따뜻하고 포근하다. 수치심 따윈 잊은 채 상현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을까?
영화가 끝난 컴컴한 방안에서 크게 들리는 그의 숨소리,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나를 위로하는 그의 음성.
'괜찮아, 괜찮아. 내가 곁에 있잖아.'
어쩌면 상현이 나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할지도 모른다. 상현에게 사랑 받는다는 느낌이 들수록 초조하게 시계만 바라본다. 12시가 지나면 마법이 풀리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외면하고 싶은 그의 진심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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