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C에서 B코드 까지

[C에서 B코드 까지] 14화 너의 의미

◈나리나리◈ 2015. 6. 15. 19:37

시계는 3시를 향해 달려간다. 5시에 예정된 신사업 마케팅 회의 자료를 작성하던 중, 머릿속 단서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엉켜버린 탓에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책도 뒤적거리지만 깜박이는 커서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불현듯 나는 대리님이 준 마케팅 자료를 꺼내 본다.

 

그가 신입사원부터 적은 마케팅 자료, 그의 손 떼가 묻어 있는 글씨가 남아있다. 한 장씩 넘기며 그의 꼼꼼한 성격에 놀랐고, 그의 세심한 코멘트가 이 자료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 것 같다. 그는 내게 왜 이 자료를 선물로 주었을까?

 

뒷장으로 넘어 갈수록 내가 그와 내가 공유했던 시간을 기록한 자료가 보인다.

 

****

무더운 여름날, 에어컨 바람이 적막한 미팅 룸을 메운다. 각자의 노트북으로 문서를 작성하던 그와 나, 그가 내게 자신의 노트북 모니터에 띄운 자료를 같이 보자고 나의 의자를 그의 옆으로 당긴다. 그는 내게 모니터에 적힌 글귀를 말하고, 나는 안경테에 가린 그의 콧잔등을 본다. 몇 번의 질문에도 대답 없는 나를 향해 그가 고개를 돌린다.

 

-너 졸립지? 우리 좀만 쉬었다가 할까?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가 내게 한 첫 스킨십이었다.

****

 

그의 마케팅 자료 모서리에 적힌 글귀가 보인다. ‘고백을 할까? 말까?’

 

핸드폰에 전화가 오자, 난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살핀다. 사무실 안은 각자의 업무로 바쁘게 흘러가고 있다. 핸드폰 액정에 상현이라고 표시 되어 있다. 작업하던 노트북을 벗어나 빈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전화 속에는 기타 반주가 시작되고 있다.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그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슬픔은 간이역의 코스모스로 피고

스쳐 불어 온 넌 향긋한 바람

나 이제 뭉게구름 위에 성을 짓고

널 향해 창을 내리 바람 드는 창을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그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슬픔은 간이역의 코스모스로 피고

스쳐 불어온 넌 향긋한 바람

나 이제 뭉개구름 위에 성을 짓고

널 향해 창을 내리 바람 드는 창을

너의 그 한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그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의미 산울림]

 

나는 핸드폰의 입 부분을 손가락으로 치며 박수를 보낸다.

 

상현: 어제 노래 못 들어서 섭섭했지?

  : 아니야. 감기는 나았어?

상현: 당연하지, 건강해~ 노래 듣고 싶을 때 언제든지 얘기해, 신청곡도 받아

  :

상현: 오늘 오후도 좋은 하루 보내~

 

상현의 전화가 끊어지고 갑자기 밀려오는 공허한 공기가 짓누른다. 입사할 때부터 존재하던 회의실, 작년에 그와 함께 했던 공간, 두 시간 후면 회의 예정인, 딱딱한 테이블만 덩그러니 채우던 그곳이 낯설게 느껴진다. 상현이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미소가 흘러나온다.

 

문자 도착 알림 불빛이 번쩍인다.

‘오늘은 7시 공원, 9시 클럽 연주 예정

그의 삶과 나의 삶이 조금씩 스며든다.

 

클럽 안, 상현의 노래를 기다리다가 잠깐 졸았는지 눈을 떠보니 상현이 앞에서 손바닥을 핀 손을 흔든다.

상현: 괜찮아? 어디 아파?

  :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상현: 얼른 집에 가서 쉬어~

 

나는 어두워진 주위를 살핀다. 이미 무대는 텅 비어있고 관객들은 없다. 웨이터가 불만스럽게 나를 쳐다본 후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다.

 

  : 벌써 끝난 거야?

상현 : 어 곤히 자 길래, 안 깨웠지.

  : 아쉽다.

 

웨이터가 대걸레로 밀면서 상현의 발을 친다.

 

웨이터 : 공연 끝났습니다. 수다는 밖에서 떠삼~

상현   : 알았어,

 

우리는 내쫓기듯 클럽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선선히 얼굴에 부딪치고 감싼다. 상현은 기타 통을 어깨에 고쳐 멘다.

 

: 기타 음색이 참 좋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져

상현 : 기타 가르쳐 줄까?

: ? 아니야~ 내가 무슨 음악을 한다고.

상현 : 음악은 잘하려고 하는 게 아냐, 좋아하니깐 하는 거지, 너 혹시 기타는 있어?

: 아니. 없어.

상현: 주말에 나랑 기타 사러 가자~

: 그러자, 한번 배워보지.

 

상현이 갑자기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본 뒤, 나의 겉옷의 매무새를 고쳐 잡는다.

 

상현: 환절기야~ 감기 조심해야지.

   

상현과 나의 눈빛이 맞닿는다. 상현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손가락으로 코 밑을 스친 후, 멋쩍어 한다. 다시 둘이 걷는다. 상현과 나란히 걷는 내내 어깨가 살짝 부딪치고 스쳐간다.

 

오늘 밤, 달이 참 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