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C에서 B코드 까지

[C에서 B코드 까지]2화 원하고 원망하죠

◈나리나리◈ 2015. 6. 3. 19:49

나뭇가지에 초록 새싹이 움튼다. 겨울이 지나고 온화한 날씨 탓에 공원에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 옆집 아주머니 같기도 하고 윗 집의 할머니 같기도 한, 여자가 얼굴에 마스크를 쓴 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고, 운동복을 맞춰 입은 아주머니 들이 떼를 지어 스쳐간다. 멀리서 낯선 아저씨가 큰 보폭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어제 추하게도 공원 한 가운데 서서 서글프게 큰소리 내서 울었다. 나를 아는 사람이 봤다면 잘근잘근 씹을 만한 꺼리었고, 낯선 이가 봤다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혀끝을 놀렸을지도 모른다. 주위를 살피며, 기타 선율이 흐르던 그 모퉁이를 향해 걸었다.

 

* * *

그와 전 여자친구는 일 년 넘게 사귀었다. 둘이 여행을 어디로 다녀왔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영화를 무엇을 봤는지 까지도 나는 그의 연애를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할 때도 있었고 내가 우연히 알게 된 것도 있었다.

그와 전 여자친구가 삐끗 거린 건 작년 봄이었다. 결혼 진행을 위한 양가 상견례 중 뜻밖에 복병을 만났다. 여자친구네 부모가 바라는 이상향이 컸다. 그는 지쳐갔고 여자친구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끝내 멀어졌다.

나는 대리님이 헤어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대리님과 야근을 핑계로 술을 마시며 여자친구인양 위로 했다. 사실 그의 여자친구가 되길, 대리님이 고백해 주길 그렇게 바라고 바랬다.

 

술이 취한 대리님을 부축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대리: 고마워, 항상

:   아니에요. 괜찮아요. 힘드시잖아요.

 

대리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리: 정말 힘들다. 나 다시 사랑 못할 거 같아.

:   아니에요. 사랑 하실 수 있어요.

대리: 누가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겠어? 없어, 그런 사람.

:   대리님이 어때서요? 대리님 정말 멋있고 괜찮은 분이세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나는 울컥했다. 대리님의 힘겨운 모습을 보는 내가 견디기 힘들었다. 그냥 나를 봐달라고 내가 당신 옆에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막연한 걱정이 조급한 나의 입술을 간신히 틀어막는다.

멀리서 다가오는 택시의 헤드라이터가 비치고, 대리님을 택시에 태워서 보낸다. 택시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말하지 못한 그의 아픔을 홀로 감내한다. 솔직한 내 감정이 그의 곁에 머물 수 없는 탓에, 그의 아픔마저 듣지 못할 거 같은 두려움, 어설프게라도 그의 곁에 맴돌면서 그를 위로 하고 싶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그의 여자친구로 3개월을 살았다. 밤마다 같이 술을 마시고 주말마다 그를 위로한다며 연락했다. 사소한 잡담부터 인생 상담까지 그의 연인이 된 것 같았다.

 

전 여자친구가 잔인하게 내뱉고 간 말로 상처 입은 그가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가 다시 기운을 내고 있다는 것, 그가 행복해지고 있다는 건 다행인데, 그와의 술자리가 줄어갈수록 그가 그리워진다. 그가 다시 아팠을 때, 힘들었을 때, 온전히 나만을 의지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품으면 안 되는 욕심이 점점 커져만 간다.

* * *  

 

아직 기타리스트가 오지 않은 듯하다. 계단에 앉자, 등에 기타를 멘 남자 두 명이 작은 무대에 기대어 앉는다. 분주하게 준비하는 그들, 기타 줄을 튕겨보고 음색을 맞추며 목을 푼다. 나는 두 명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짙은 어둠이 그들을 숨기고, 모자 속 실루엣이 얼굴의 윤곽만 잡아준다.

그들은 조율이 끝났는지, 앞에 관객석을 훑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주머니 몇 분이 맨 뒤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

 

기타리스트: 혹시 신청 곡이 있으시면 여기 앞에 펜 있으니깐 적으시면 되요. 그럼 노래 시작하겠습니다.

 

[아직 누굴 사랑할 수 없는..

그대 지친 가슴을 난 너무나 잘 알죠..

변함없이 그대 곁을 지켜왔지만..

그댄 지나버린 사랑 그 안에만 사는 걸..

원하고 원망하죠..그대만을..

내게 다가온 시간을 힘겹게 만드는 사람..

지난 날들을..그대의 아픈 얘기를 모르고 싶은걸..

소리 내어 환히 웃을 때도..

그대 가슴은 울고 있는 걸 느끼죠..

그런 그댈 끌어안아 주고 싶지만..

이런 내 맘 들키지 않기로 한걸요..

원하고 원망하죠..그대만을..

내게 다가올 시간을 힘겹게 만드는 사람..

그대 지난 날들을..그대의 아픈 얘기를 모르고 싶은걸..

지금 그대는 빈 자릴 채워줄 누구라도 필요한 거겠죠..

잠시 그대 쉴 곳이 되어주기엔..

나는 너무나 욕심이 많은걸..

원하고 원망하죠..그대만을..

내게 다가올 내일을 후회로 만드는 사람..

이런 내 맘을 혼자서 얘기할게요..

그댈 너무 사랑해요..

 원하고 원망하죠_애즈원]

 

내 귓가에 들리는 슬픈 그의 음성, 나에게 그와 보낸 3개월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